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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보고 듣다(문장배달)

존 버거, 『킹』

by 아프로뒷태 2014. 11. 8.

“희망의 핵심은, 그것이 아주 어두운 곳에서 생겨나는 무엇이라는 점입니다.”
 
- 존 버거『사진의 이해』중에서 -



실수는, 킹, 적보다 더 미움을 받는 거야. 실수는 적처럼 굴복하지 않으니까. 실수를 물리치는 일 같은 건 없는 거야. 실수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인데, 만약에 있다면 덮어야만 하지. 우리는 저들의 실수야, 킹. 그걸 잊으면 안 돼.

비코의 걸음걸이가 바뀌었다. 갑자기 그의 발걸음에는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어졌다. 결심을 한 듯, 발끝으로 가볍게, 거의 춤을 추듯 걷는다. 음악은 들리지 않고, 재킷의 어깨 부분이 보기 흉하게 돌아가고 터졌다. 그 모습을 그대로 비카에게 말했는데 그녀가 내 말을 들었는지 혹은 이해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지휘관이 비코를 발견하고,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알아보는 시늉을 했다. 나이 든 부랑자를 불러 확성기를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몇 마디 해 달라고, 자신처럼 정신 차리고 순순히 밖으로 나오라고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지휘관은 시계를 보며 시간이 늦었다는 걸 확인했다.

거리나 시간을 판단하기 어려웠던 건 전조등의 불빛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코는 결심한 듯 지프를 향해 걸어갔는데, 거기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꽤 긴 것 같았다. 그를 지켜보는 것들이 모두 그 점을 알아차렸다. 쓰레기 더미나 자갈들, 버려진 기계 부품들이, 그가 지나자마자 저절로 움직여 다시 거의 앞을 막아서는 것 같았다.


* 작가 _ 존 버거 - 작가. 1926년 영국 런던 출생. 미술 비평가, 사진 이론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 비평가.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시골 마을로 옮겨 가 살면서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 해 오고 있음. 저서로 『본다는 것의 의미』『말하기의 다른 방법』『그들의 노동에 함께 하였느니라』『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A가 X에게』등이 있음.

낭독_ 우미화 – 배우. 연극 '말들의 무덤',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농담' 등에 출연. 이상구 - 배우. 연극 '리어왕', '싸리타' '유리알눈'등에 출연.

* 배달하며: 킹은 개의 이름이자 이 소설의 화자입니다. 늙은 비코와 그의 동거인 비카와 함께 도시를 관통하는 고속도로 옆에서 살고 있지요. 하치장이라고 불리는 이곳엔 이들 외에도 희망과 시대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습니다. 어느 날 기중기와 지프, 전경들을 이끌고 지휘관이 찾아옵니다.
실수를 덮으면 체제가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지휘관과 어쩌면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희망의 출발’이라고 믿는 비코의 거리가 차츰 가까워지고 있군요.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비카는 전에 킹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냥, 킹, 처음에 어땠는지, 그리고 집이라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말해 주고 싶었던 거야. 그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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