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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오랫만에 불러보는 윤동주 시인. 일본의 츠지 희토나리가 칭송했던 윤동주.

by 아프로뒷태 2013. 3. 20.
<사랑후에 오는 것들> 시리즈로 한국의 공지영과 일본의 츠지 희토나리 작가가 사랑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츠지 희토나리가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윤동주 시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칭송했다. 그리고 그는 비록 일본인이지만 윤동주 시인에 대해 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대학 수업때 들었던 윤동주 시선집을 꺼내든다. 그리고 이 글을 남긴다.  

 

 

 

 내가 아는 시인 윤동주 형

문익환

(시인, 목사)

 

 

 

나는 누구보다도 동주 형을 안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그의 친동생 일주보다 더 안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자부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감성이 가장 예민한 국민 학교 6년 간을 그와 한 교실에서 배우며 뛰놀았다. 한 반이라야 20명 내외였으니 얼마나 서로 가까이 알 수 있었겠느냐는 것은 물을 나위도 없다.

 

우리 반에는 중학교 2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숟가락>이라는 콩트로 당선한 송몽규도 있었다. 동주와 몽규는 외사촌간이다.

 

동주나 몽규느느 나보다는 한 살 위여서 나는 어딘지 모르게 그들 앞에서 어리게 느껴지곤 했는데, 그 느낌은 지금도 여전하다.

 

우리는 그 작은 교실에서 민족심을 불태웠고, 소박한 대로 기독교 신앙의 분위기를 맛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6년 동안 "얘" "쟤" 하면서 자란 명동학교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명동은 북간도 민족 운동의 요람이었고 정신적인 중심지였다.

거기는 북간도의 대통령이라고 하던 김약연 목사님이 사는 곳이었고 안중근 의사가 와서 권총 사격 연습을 하신 곳이다.

 

그리고 모여든 우국지사들이 민족 광복의 먼 앞날을 내다보며 오는 세대의 교육을 위해서 세운 학교가 명동학교였다. 이 명동학교 출신들이 만주, 연해주 각처로 흩어져 민족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소위 15만 원 사건을 일으킨 의사들도 거의 다 명동중학교 졸업생이었다.

 

6학년 때 일이다. 학생 자치회가 조직되고 내가 초대 신문사 사장이 되었다. 동주 형이 무슨 부서를 맡았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신문사라야 한 달에 한 번 벽신문을 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신문에 동주 형의 글이 가끔 실려졌지만, 워낙 기억력이 없어서 나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가 다닐 그때는 그 학교에도 일본어 과목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일본말이라고 하면서 일본어를 통 공부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해도 일본말을 몰라서 어떻게 할 길이 없었다.

 

그때 우리 집은 용정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나는 용정에서 해성학교에 들어가 1년 동안 일본말 공부를 해야 했다. 그 1년 동안 동주형은 몽규 형과 함께 명동에서 한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중국학교에 가서 중국말 공부를 하였다.

1년 후에 우리는 용정 은진중학교에 나란히 입학해서 3년을 같이 다녔다.  몽규 형이 어떤 사명을 띠고 중국 본토에 갔다 온이 아마도 은진 3학년 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3학년을 마치고 대학 진학을 위해서 평양 숭실학교에 전학을 했는데, 다음 학기에 동주 형도 숭실학교에 전학을 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기숙사 밥을 먹으면서 더 가까워진 셈이다. 전학해 온 그 학기로 숭실학보 편집에 참여할 만큼 그의 문학 수련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가 바로 한국 교회는 신사 참배 문제로 들썩거리던 1935년이었다. 숭실중학교 학생 전원이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데모를 벌이고 일본 순경과 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일이 있은 후 주동자들은 뿔뿔이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주 형과 나는 짐을 꾸려 가지고 다시 용정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경영하는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돼서 공부하게 되었다. 냄비에서 뛰어내려 숲불에 올라앉은 격이랄까?

 

이 아이러니를 읊조린 것이 그의 <한란계>라는 시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 나는 일본 도쿄로 신학을 공부하러 가고, 동주 형과 몽규 형은 문학 공부하러 연전으로 올라왔다. 그 다음 우리가 만난 것이란 방학 때뿐이었다. 방학 때 만나서 우리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이름이 키에르케고르와 릴케였다. 키에르케고르는 나도 좀 아는 처지여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었고 릴케는 신학교 예과 독어 시간에 더러 읽은 일이 있어서 동주 형이 하는 이야기들을 조금은 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느 여름 방학에 동주 형은 서정주의 <화사집>을 내게 보여주면서 보기 드불게 흥분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정지용 시집은 중학교 때부터 늘 끼고 다녔다. 그 바람에 나도 정지용의 시는 지금도 더러 외는 것이 있다.

 

동주 형이 연전을 마치고 도쿄 릿쿄 대학으로 건너갔을 때는 나는 폐병으로 집에 가서 쉬고 있을 때였다. 마침 병이 나어서 도쿄로 다시 건너가서 동주 형의 하숙방을 찾아가 반갑게 만났다. 그것이 그를 만난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때는 이미 교토로 옮기기로 결정한 다음이었다. 교토 대학 사학과에서 공부하던 몽규 형이 그를 그리고 끌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가 그와 갈라진 그 하숙방이 바로 "육첩방은 남의 나라" 라고 읊었다가 일제의 잔악한 손에 죽은 문제의 시<쉽게 쓰여진 시>가 씌어진 방이었겠지.

 

이만하면 내가 동주 형을 안다고 자부할 만도 하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근자에 <윤동주론>을 '시간과 역사'라는 관점에서 쓰면서 <크리스찬 문학> 제 5집에 실림, 내가 얼마나 동주 형을 몰랐었느냐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초 한 대> 라는 동주 형이 만 15세가 되기 엿새 전인 1934년 크리스마스 전날 쓴 것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나는 머리에 철퇴라도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 시를 쓸 때 벌써 동주 형은 자신을 어린 양 그리스도처럼 민족의 재단, 인류의 제단 위에 오를 깨끗한 제물로 보았던 것이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마지막 연이다. 같은 무렵에 <동아일보> 에 콩트가 당선된 몽규 형 앞에서 동주 형은 좀 풀렸던지 "대기는 만성이지" 하던 말이 기억난다.

 

그러나 이 시를 보고 누가 동주를 만성한 대기라고 하랴!

나는 그에게서 치솟은 수려하고 의연한 시맥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서거 50주면 기념 윤동주 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 중에서 -권영민 서울대 교수 편저.

 

 

 

윤동주 시인 육필원고·까까머리 시절 사진 등 공개

유족, 유품 기증 특별전 개최경향신문|김한솔 기자|입력2013.02.27 22:45|수정2013.02.28 09:54

 

 

 

일제강점기 대표적 저항시인인 윤동주의 육필원고와 중학교 때 찍은 사진 등 유품들이 공개됐다.

연세대는 27일 연세삼성학술정보관에서 '윤동주 시인의 유고·유품 기증 특별전' 개막식을 열고 윤 시인의 자취가 서려 있는 육필원고와 유품 등을 전시했다.

이번 전시는 윤 시인의 유가족인 윤인식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가 윤 시인의 육필원고와 유품을 기증한 데 따른 것이다.

27일 공개된 윤동주 시인(왼쪽)과 독립운동가 송몽규씨(오른쪽)의 사진. 윤 시인은 당시 중국 광명중 5학년, 송씨는 대성중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 연세대 제공

윤 교수가 기증한 물품은 윤 시인이 육필로 쓴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비롯한 129편의 시와 윤 시인의 손때가 묻은 각종 유품 등이다.

1940~1950년대 처음 한국어로 발행된 윤동주의 시집과 영어·불어·일어·중국어·체코어로 번역된 윤동주 번역시집, 윤 시인의 친필 서명이 기재돼 있는 책, 연희전문 졸업앨범과 기념버클 등도 포함됐다.

특히 윤 시인이
고종사촌인 독립운동가 송몽규와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도 최초로 공개됐다. 이 사진은 윤 시인이 중국 광명중 5학년, 송몽규가 대성중 4학년에 재학할 당시 중국 용정에서 찍은 것이다. 시기는 1937년쯤으로 추정된다.

1917년 북간도에서 출생한 윤 시인은 1944년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일본
후쿠오카의 형무소에 수감됐다. 윤 시인은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사망했다.

연세대는 이날 교내 핀슨홀에서 '윤동주 기념관' 현판식을 열었다. 핀슨홀은 윤 시인이 연희전문에 재학할 당시 생활했던 기숙사 건물이다.

<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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