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대학 못가면 죽는다는 건 사회가 심은 망상… 외로운 젊은이들, 두려워 마세요”
1970년대와 80년대, ‘백낙청’은 진보적 지식인, 독재타도, 민주주의, 창작과비평 등과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였다. 현재 우리 사회의 골격을 이루는 40·50대는 청춘의 한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분으로 백낙청 선생(73·서울대 명예교수)과 고 리영희 선생을 주저없이 꼽는다. 그들의 대학시절 선생들의 책은 생각을 공유하고, 행동하게 하던 ‘삶의 지침서’이자 ‘정신적 영양제’였다. 내가 그랬다는 건 아니다. 내 주변의 수 많은 인생선배들로부터 귀동냥한 것이다. 스펙쌓기라는 무한경쟁, 패자부활전 없는 낙오의 위기에 몰린 요즘 젊은이들이 더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것은 이런 정신적 안식처가 없다는 점이다. 많은 지식인과 텍스트가 쏟아져나오고 스타는 넘쳐나지만 그걸 꿰뚫을 ‘뭔가’가 없는 시대다. 우리네 삶이 황사(黃沙)처럼 신산(辛酸)한 요즘, 백 선생을 뵙고 삶에 대해 조언을 구할 수 있게 된 건 감사할 일이다. 오랫동안 동경하던 스타를 만나는 팬처럼 나는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이룰 정도로 들떠 있었다.
-전 그동안 인터뷰하면서 주로 등산복만 입었어요. 오늘은 선생님을 뵙는다고 양복 비슷하게 입은 건데, 선생님은 무지 멋지게 차려입으셨는데요?
“집사람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이렇게 입으라고 해서 한 거예요.”
-제가 선생님을 만난다니까 다들 ‘일생의 영광’으로 알아야 한대요. 또 어찌나 겁을 주던지….
“내가 제동씨 팬이기도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백아무개가 누군지 몰라도 (김제동도 만나고) 운 좋다고 할 거 아니에요.”
선생께서 내 이름을 알고 계신 것도 신기했지만 내 <토크콘서트>를 직접 보셨다고 해서 더 감격했다. “최근 보신 예능 프로그램이 없으셨냐?”는 질문에 선생은 “<김제동의 토크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게다가 조용필, 장사익, 이경규씨 등 당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말석에 황송하게도 김제동을 앉혀주셨다. 게다가 ‘김제동이 찍혀서 주류에서 외면 당한다’는 것도 아셨다.
요즘 창궐… 마지막 고비”
▲ “독재정권하에서 목소리를 내는 용기는 어디서 나온 걸까. 나라면 무릎 꿇는 척 했을 텐데.” - 김제동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오셨던데요.
“초등학교 때는 반마다 그런 이야기 듣는 아이들이 있잖아요. 위로 갈수록 천재가 수재가 되고 결국은 범재가 되는 수가 많지만요. 제 주변에도 번뜩이는 재능을 보이는, 저 정도면 천재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솔직히 제 경우는 노력파입니다. 천재니 뭐니 하는 건 괜한 소리죠.”
-선생님은 유학 중에 귀국하셔서 자진입대까지 하셨어요. 당시에 일간지 사회면에 톱뉴스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어떻게 선생님 같은 분이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신 거죠?
“제동씨도 알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빨갱이란 단어는 공산주의자를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너 까부는데 기분 나쁘다’ ‘너 힘없지? 난 힘있다’는 식의 의사표현 방법이 아닌가 싶어요. 상대의 입을 막는 동시에 본인의 사고를 정지시키는 방법이지요. 누가 나에게 문제제기하고 비판할 때 ‘빨갱이’라고 비난해 버리면 그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거든요. 사실은 자기 손해인 건데. 요즘도 그 말을 즐겨 쓰는 사람이 많고, 그런 어법이 창궐하고 있지만 마지막 고비 같아요. 이 고비를 넘기면 우리 사회에도 ‘생각을 좀 하고 살아야겠다’ ‘맘에 안든다고 아무나에게 빨갱이라고 하면 나도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될 날이 올 겁니다.”
서슬 퍼렇던 독재정권 하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셨던 걸까. 내가 선생이었다면 총칼 앞에서 무릎 꿇라면 꿇는 척하면서, 한 쪽 무릎은 살짝 드는 정도의 비굴함을 보이지 않았을까.
“60년대 중반 ‘창비(당시 창작과비평)’ 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죠. 70년대엔 저들이 나를 학교에서 쫓아냈으니까 떠들고 다닐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요즘보다 좋은 점도 있었어요.”
-좋은 점이라뇨?
“적극적으로 동조하진 않아도, 정부에 맞서는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한다는 공감이 있었어요. ‘창비’가 탄압을 받으면 책이 더 팔리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지금보다는 훨씬 분위기가 좋았죠. 지금은 제 목소리를 내기가 더 어려운 시대잖아요. 당장 잡아가서 고문하는 건 아니지만 직장에서 쫓겨나면 세상에서 바보 취급당하고, 가정 파괴 수준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잖아요. 의롭다고 치켜주는 분위기도 한결 덜하고….”
-요즘은 심리적인 위축을 받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두렵다는 느낌도 많이 갖고요.
“바로 그 점에서 그 때가 나았다는 거예요. 심정적 지지도 훨씬 강했고. 80년대에 광주항쟁을 겪고 광주의 진실을 알고 나서, 이런 세상은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가 부쩍 늘었지요. 전국적으로 보면 소수였지만 그래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공감대를 형성했어요. 그런데 그게 민주화가 되고 나서 깨졌지요. 어느 정도 됐다고 해서 풀어지기도 하고, 돈도 더 돌다보니…. 어떻게 보면 이 정권 들어와서 조금 더 긴장감을 회복시켜 주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감사해야 할 것 같네요.”
-전 민주화항쟁 사진 중에서 기억나는 게 넥타이를 맨 퇴근길의 시민이 탱크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장면이에요. 심리적 공감대가 만들어낸 용기랄까요.
“국민을 억압하고 우롱하는 것이 통하는 이유는 알아서 기어주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묘한 동물이라서 어느 단계까지는 겁을 먹지만 그게 지나치면 (겁이) 없어져요. 그러면 권력을 쥔 사람들은 맥을 못추죠. 이번에 이집트에서 벌어진 것을 봐도 그렇고 광주, 6월항쟁, 4·19 다 그래요. 유혈사태까지 가지 않았지만 촛불도 그랬고….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설혹 그 열기가 가라앉아도 세상은 바뀐다고 봐요. 절대로 없었던 일이 되진 않죠. 지금 우리사회도 바닥에서 많이 바뀌고 있는데 아직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인 것 같아요.”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세상 바닥부터 바뀔 것”
▲ “나는 20대 초반까지 ‘광주항쟁’을 빨갱이들이 벌인 줄 알았다. 주류언론이 보도했으니까.” - 김제동
-그런데 선생님,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촛불항쟁이 정권초기의 국정운영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에 잘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다고….
“더 잘했을 거라고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예요. 게다가 우리는 촛불을 거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거대 언론이 어떤 것이라는 걸 실감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자신들이 촛불시위에서 한 일들이 이튿날 신문에 어떻게 나오는지 봤잖아요. 무책임하고 악의적이고 제멋대로 왜곡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통일은 반드시 되어야 하는 거죠?
“그렇죠. 다만 일제 강점기보다 더 긴 세월을 갈라져 살아왔기 때문에 통일국가를 단기간에 세울 순 없어요. 점진적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지혜롭게 해야죠. 무턱대고 통일만 해야 한다, 아니면 반통일세력이라고 하면 젊은이들은 공감할 수 없죠. 그것보다는 우리가 분단해 살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손해이고, 우리 인생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를 들여다보고 성찰해서 극복할 방법을 고민해야죠.”
-3대세습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민주주의에도 안 맞고 원래 사회주의 명분에도 안 맞아요. 좋게 볼 수가 없죠. 그러나 북측 사회가 분단체제의 일부로서 갖고 있는 문제점들이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드러난 현상이 3대세습이라고 봐야죠. 그런데도 마치 정상적으로 진행되어온 사회주의 국가에서 갑자기 불거져 나온 문제라거나, 규탄하고 반대하면 시정할 수 있는 그런 사태로 볼 일은 아니지요.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전체 흐름을 보면서 이런 북한 사회와 어떻게 대화하고 절충해서 궁극적으로 통일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야지, 이제 북측 사회의 왕조적 면모를 처음 발견했다는 듯이, 떠들어대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대구에서 나고 자란 나는 20대 초반까지도 ‘광주항쟁’을 빨갱이들이 벌인 줄 알고 살았다. 주류언론이 다 그렇게 보도했으니까. 부끄럽지만 난 20대 후반, 소설 <태백산맥>을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 당장의 성과와 달라진 점이 없다고 탓할 게 아니다. 촛불항쟁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은 거대 보수언론이 왜곡하는 것을 다 이겨내고 진실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요즘 학생들은 스스로 학교를 나오기도 하고 대학을 버리겠다고도 하는데, 선생님 같은 어른들이 그들과 만나는 기회를 좀 더 늘려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외로운 젊은이들…. 글쎄요. 좋은 대학 안 들어가고 좋은 직장 못 가면 죽는다는 건 착각이에요. 사회가 심어준 망상이죠. 우리사회에서 대학이 참 안 바뀐 것 같아요. 최근에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죠. 신자유주의적 논리로 말예요. 민주화 이후 다른 분야는 물갈이가 꽤 됐는데 대학은 안됐어요. 당장 정면으로 맞서서 바꿔놓겠다는 것보다 그때그때 생기는 기회를 게릴라식으로 활용하면서 버티는 수밖에 없지 싶어요. 과욕을 안 부리고 최대한 변화의 여지를 넓혔다가 나중에 정규전을 펼칠 기회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젊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세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죠. 당당히 세상과 맞서라는 겁니다.”
-참, 결혼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선생께서는 늘 ‘남북관계’만 이야기해 오셨겠지만, 전 ‘남녀관계’가 항상 궁금해요.
“오다가다 만나서 같이 살자고 했지요. 집사람이 언론사 도서실에 근무했는데 우연히 친구 만나러 갔다가 만났어요. 알고 보니 제 친구가 저에게 소개해주려고 점찍어 놨다더군요. 차 한 잔 하자고 했더니 처음엔 꽤 도도하게 굴더라고. 그렇게 몇 번 만나다가 결혼하자고 했지.”
그렇다.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터뷰 말미에 선생은 나에게 얼짱, 몸짱에 마음 뺏기지 말고, 마음씨 고운 처자를 만나라고 충언까지 하셨다. 어렵던 선생님이 갑자기 동네 슈퍼마켓 앞에서 만난 이웃집 어르신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남북문제, 세대갈등, 이념갈등도 이렇게 풀어야 하는 게 아닐까. 서로가 마음을 활짝 열고….
-전 그동안 인터뷰하면서 주로 등산복만 입었어요. 오늘은 선생님을 뵙는다고 양복 비슷하게 입은 건데, 선생님은 무지 멋지게 차려입으셨는데요?
“집사람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이렇게 입으라고 해서 한 거예요.”
-제가 선생님을 만난다니까 다들 ‘일생의 영광’으로 알아야 한대요. 또 어찌나 겁을 주던지….
“내가 제동씨 팬이기도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백아무개가 누군지 몰라도 (김제동도 만나고) 운 좋다고 할 거 아니에요.”
선생께서 내 이름을 알고 계신 것도 신기했지만 내 <토크콘서트>를 직접 보셨다고 해서 더 감격했다. “최근 보신 예능 프로그램이 없으셨냐?”는 질문에 선생은 “<김제동의 토크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게다가 조용필, 장사익, 이경규씨 등 당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말석에 황송하게도 김제동을 앉혀주셨다. 게다가 ‘김제동이 찍혀서 주류에서 외면 당한다’는 것도 아셨다.
▲ “‘빨갱이’라는 단어는 상대방 입막는 방법
요즘 창궐… 마지막 고비”
▲ “독재정권하에서 목소리를 내는 용기는 어디서 나온 걸까. 나라면 무릎 꿇는 척 했을 텐데.” - 김제동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오셨던데요.
“초등학교 때는 반마다 그런 이야기 듣는 아이들이 있잖아요. 위로 갈수록 천재가 수재가 되고 결국은 범재가 되는 수가 많지만요. 제 주변에도 번뜩이는 재능을 보이는, 저 정도면 천재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솔직히 제 경우는 노력파입니다. 천재니 뭐니 하는 건 괜한 소리죠.”
-선생님은 유학 중에 귀국하셔서 자진입대까지 하셨어요. 당시에 일간지 사회면에 톱뉴스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어떻게 선생님 같은 분이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신 거죠?
“제동씨도 알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빨갱이란 단어는 공산주의자를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너 까부는데 기분 나쁘다’ ‘너 힘없지? 난 힘있다’는 식의 의사표현 방법이 아닌가 싶어요. 상대의 입을 막는 동시에 본인의 사고를 정지시키는 방법이지요. 누가 나에게 문제제기하고 비판할 때 ‘빨갱이’라고 비난해 버리면 그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거든요. 사실은 자기 손해인 건데. 요즘도 그 말을 즐겨 쓰는 사람이 많고, 그런 어법이 창궐하고 있지만 마지막 고비 같아요. 이 고비를 넘기면 우리 사회에도 ‘생각을 좀 하고 살아야겠다’ ‘맘에 안든다고 아무나에게 빨갱이라고 하면 나도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될 날이 올 겁니다.”
서슬 퍼렇던 독재정권 하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셨던 걸까. 내가 선생이었다면 총칼 앞에서 무릎 꿇라면 꿇는 척하면서, 한 쪽 무릎은 살짝 드는 정도의 비굴함을 보이지 않았을까.
“60년대 중반 ‘창비(당시 창작과비평)’ 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죠. 70년대엔 저들이 나를 학교에서 쫓아냈으니까 떠들고 다닐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요즘보다 좋은 점도 있었어요.”
-좋은 점이라뇨?
“적극적으로 동조하진 않아도, 정부에 맞서는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한다는 공감이 있었어요. ‘창비’가 탄압을 받으면 책이 더 팔리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지금보다는 훨씬 분위기가 좋았죠. 지금은 제 목소리를 내기가 더 어려운 시대잖아요. 당장 잡아가서 고문하는 건 아니지만 직장에서 쫓겨나면 세상에서 바보 취급당하고, 가정 파괴 수준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잖아요. 의롭다고 치켜주는 분위기도 한결 덜하고….”
-요즘은 심리적인 위축을 받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두렵다는 느낌도 많이 갖고요.
“바로 그 점에서 그 때가 나았다는 거예요. 심정적 지지도 훨씬 강했고. 80년대에 광주항쟁을 겪고 광주의 진실을 알고 나서, 이런 세상은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가 부쩍 늘었지요. 전국적으로 보면 소수였지만 그래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공감대를 형성했어요. 그런데 그게 민주화가 되고 나서 깨졌지요. 어느 정도 됐다고 해서 풀어지기도 하고, 돈도 더 돌다보니…. 어떻게 보면 이 정권 들어와서 조금 더 긴장감을 회복시켜 주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감사해야 할 것 같네요.”
-전 민주화항쟁 사진 중에서 기억나는 게 넥타이를 맨 퇴근길의 시민이 탱크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장면이에요. 심리적 공감대가 만들어낸 용기랄까요.
“국민을 억압하고 우롱하는 것이 통하는 이유는 알아서 기어주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묘한 동물이라서 어느 단계까지는 겁을 먹지만 그게 지나치면 (겁이) 없어져요. 그러면 권력을 쥔 사람들은 맥을 못추죠. 이번에 이집트에서 벌어진 것을 봐도 그렇고 광주, 6월항쟁, 4·19 다 그래요. 유혈사태까지 가지 않았지만 촛불도 그랬고….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설혹 그 열기가 가라앉아도 세상은 바뀐다고 봐요. 절대로 없었던 일이 되진 않죠. 지금 우리사회도 바닥에서 많이 바뀌고 있는데 아직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인 것 같아요.”
▲ “거대언론 촛불 왜곡 경험…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세상 바닥부터 바뀔 것”
▲ “나는 20대 초반까지 ‘광주항쟁’을 빨갱이들이 벌인 줄 알았다. 주류언론이 보도했으니까.” - 김제동
-그런데 선생님,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촛불항쟁이 정권초기의 국정운영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에 잘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다고….
“더 잘했을 거라고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예요. 게다가 우리는 촛불을 거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거대 언론이 어떤 것이라는 걸 실감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자신들이 촛불시위에서 한 일들이 이튿날 신문에 어떻게 나오는지 봤잖아요. 무책임하고 악의적이고 제멋대로 왜곡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통일은 반드시 되어야 하는 거죠?
“그렇죠. 다만 일제 강점기보다 더 긴 세월을 갈라져 살아왔기 때문에 통일국가를 단기간에 세울 순 없어요. 점진적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지혜롭게 해야죠. 무턱대고 통일만 해야 한다, 아니면 반통일세력이라고 하면 젊은이들은 공감할 수 없죠. 그것보다는 우리가 분단해 살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손해이고, 우리 인생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를 들여다보고 성찰해서 극복할 방법을 고민해야죠.”
-3대세습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민주주의에도 안 맞고 원래 사회주의 명분에도 안 맞아요. 좋게 볼 수가 없죠. 그러나 북측 사회가 분단체제의 일부로서 갖고 있는 문제점들이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드러난 현상이 3대세습이라고 봐야죠. 그런데도 마치 정상적으로 진행되어온 사회주의 국가에서 갑자기 불거져 나온 문제라거나, 규탄하고 반대하면 시정할 수 있는 그런 사태로 볼 일은 아니지요.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전체 흐름을 보면서 이런 북한 사회와 어떻게 대화하고 절충해서 궁극적으로 통일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야지, 이제 북측 사회의 왕조적 면모를 처음 발견했다는 듯이, 떠들어대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대구에서 나고 자란 나는 20대 초반까지도 ‘광주항쟁’을 빨갱이들이 벌인 줄 알고 살았다. 주류언론이 다 그렇게 보도했으니까. 부끄럽지만 난 20대 후반, 소설 <태백산맥>을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 당장의 성과와 달라진 점이 없다고 탓할 게 아니다. 촛불항쟁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은 거대 보수언론이 왜곡하는 것을 다 이겨내고 진실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요즘 학생들은 스스로 학교를 나오기도 하고 대학을 버리겠다고도 하는데, 선생님 같은 어른들이 그들과 만나는 기회를 좀 더 늘려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외로운 젊은이들…. 글쎄요. 좋은 대학 안 들어가고 좋은 직장 못 가면 죽는다는 건 착각이에요. 사회가 심어준 망상이죠. 우리사회에서 대학이 참 안 바뀐 것 같아요. 최근에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죠. 신자유주의적 논리로 말예요. 민주화 이후 다른 분야는 물갈이가 꽤 됐는데 대학은 안됐어요. 당장 정면으로 맞서서 바꿔놓겠다는 것보다 그때그때 생기는 기회를 게릴라식으로 활용하면서 버티는 수밖에 없지 싶어요. 과욕을 안 부리고 최대한 변화의 여지를 넓혔다가 나중에 정규전을 펼칠 기회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젊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세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죠. 당당히 세상과 맞서라는 겁니다.”
-참, 결혼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선생께서는 늘 ‘남북관계’만 이야기해 오셨겠지만, 전 ‘남녀관계’가 항상 궁금해요.
“오다가다 만나서 같이 살자고 했지요. 집사람이 언론사 도서실에 근무했는데 우연히 친구 만나러 갔다가 만났어요. 알고 보니 제 친구가 저에게 소개해주려고 점찍어 놨다더군요. 차 한 잔 하자고 했더니 처음엔 꽤 도도하게 굴더라고. 그렇게 몇 번 만나다가 결혼하자고 했지.”
그렇다.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터뷰 말미에 선생은 나에게 얼짱, 몸짱에 마음 뺏기지 말고, 마음씨 고운 처자를 만나라고 충언까지 하셨다. 어렵던 선생님이 갑자기 동네 슈퍼마켓 앞에서 만난 이웃집 어르신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남북문제, 세대갈등, 이념갈등도 이렇게 풀어야 하는 게 아닐까. 서로가 마음을 활짝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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