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h Piaf - Non, Je Ne Regrette Rien
4년전기억을 소재로 장편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었다. 영화사에서 한국영화 기획일을 하다 잠시 휴식기를 가질 무렵이었고, 글을 쓰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모교 대학의 영상학과와 관련된 장편 시나리오 개발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고 장편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 장편 시나리오 작업이라.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흔쾌히 시나리오 작업에 임했다. 오랫동안 다른 작가와 감독의 작품들을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하느라, 자신의 작품을 쓰지 못한 점에 있어서 아주 목말라 있었던 터였다.
나의 고민은 무엇을 쓸 것인가가 아니었다. 내가 쓰는 것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고, 개연성이 있는가의 문제였다. 개연성의 문제. 그렇다. 라깡으로 비유하자면, 나의 이야기는 상상계가 아니라 상징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깨지고 부셔져도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실재가 되어야 했다. 나는 그 점에서 고민하기를 무심히 하지 않았다.
그때 나의 고민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인간의 뇌에서 기억이라는 것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쁜 기억은 아무리 지우려고 애를 써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쁜 기억은 마치 스펀지같았다. 나쁜 기억은 뇌에서 강한 충격을 주는 동시에 오랫동안 뇌에 머물거나 시도때도 없이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인간만이 가진, 인간만이 느끼는 고통이었다. 나는 고민했다. 왜 인간은 이런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가? 이러한 고통은 어떻게 해서 생산되는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고통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사회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나는 끊임없이 기억에 관련된 책들을 읽고 답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답은 모호하거나 추상적이어서 알 듯 하면서도 모를 듯 하였다. 당시 내가 기억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책의 어느 구절에 밑줄을 긋고 곰곰이 생각했던 부분을 다시 떠올려 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단편소설 [유미우라]에서, 한 소설가는 30년 전 그를 만나 적이 있다고 하는 어떤 여인의 예기치 않은 방문을 받는다. 여인의 말에 따르면 그가 항구 축제 기간 동안 '유미우라'라는 동네에 방문했을 때 그들이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최근에 기억이 혼란스러워지는 문제로 고생했기 때문에 이 일도 정신적 감퇴 증세가 더 심각해진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가는 여인으로부터 자신이 그녀의 방에 갔던 날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경악하고 만다. "당신은 나에게 결혼하자고 했어요." 라고 그녀는 회상한다. 소설가는 자기가 얼마나 중대한 사실을 망각했는지를 알고 아찔해진다. 여인은 그들이 함께 한 시간을 절대 잊은 적이 없으며, 그에 대한 기억 때문에 계속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충격을 받은 소설가는 여인이 떠난 후 자기가 갔던 곳과 그곳에 간 이유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지도를 꺼내어 유미우라 라는 마을을 찾는다. 그러나 지도에도 책에도 그 같은 마을은 없다. 그제야 비로소 소설가는 여인의 기억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록 여인은 세세한 내용과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완전히 허구였던 것이다.
가와바타 소설은 기억 때문에 곤경에 처할 수 있는 경우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따금 과거를 잊기도 하고, 때로는 과거를 왜곡하기도 한다. 불편한 기억들은 수년 동안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기억에 의존해 엄청나게 다양한 일들을 해 나간다. 친구들과 나우었던 대화를 회상하고, 가족 휴가를 떠올리며. 필요한 약속과 용건을 기억한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을 기억하고, 좋고 싫은 음식을 기억하며, 새 직장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기도 한다. 이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에 의존한다. 기억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무척이나 광범위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기억의 망각이나 왜곡으로 곤란한 상황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기억의 오류는 오랫동안 많은 과학자들을 매혹시켰다.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기억 오류의 문제뿐 아니라 알츠하아머병이라는 괴물도 나타나 위협을 주기도 했다. [유미우라]에 나오는 여인의 기억왜곡은 믿기 어려운 정도에 이른 것 같지만 실제로 그와 비슷하거나 심지어 그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기억은 우리의 뇌속에서 발생하고 우리의 뇌속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공존한다. 프로이드는 우리의 의식구조를 에고와 슈퍼에고 이드로 구분하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의식의 세계이다. 무의식이 얼마나 큰 세계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빙산을 떠올려 보면 된다. 수면위에 떠오른 빙산은 커 보여도 수면 아래의 빙신은 그보다 더 아주 크다. 수면에 드러난 빙산은 수면 아래에 있는 빙산의 몇십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의 뇌구조속에서 무의식의 세계는 엄청난 공간성을 가지며 존재한다. 우리는 다만 무의식을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물론 무의식을 의식할 때가 있다. 말 그대로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때나, 꿈을 꿀 때이다.
꿈에서 무의식이 드러나다.
그렇다. 우리 뇌구조에서 어마한 사유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무의식은 꿈에서 드러난다. 물론 꿈에서 드러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분이 그 꿈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거나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무의식속에 네가 정말 진짜로 원하는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무의식에서 작용하는 일들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듯 보인다. 그가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작업들, 무의식, 기억에 관해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은 전작 [메멘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메멘토]에서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인셉션]은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꿈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내가 조금 애정하는 영화 평론가 달시파켓은 [인셉션] 영화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 영화를 한두 문장으로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의 꿈속에 들어가 비밀을 훔칠 수 있는 한 남자가 재벌 사업가의 꿈속에 들어가 새로운 생각을 심도록 고용된다."
그렇다. 영화는 돔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드림머신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꿈속에 들어가 다른 사람의 생각과 판단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생각을 심어주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코브가 아내를 살인한 죄로 국제적인 수배자가 된 것이 아니라, 아내와 함께 공유한 기억작업으로 인해 서로의 사랑과 믿음이 어긋나게 되고 그래서 살인 누명을 쓰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코브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현실과 환상 속에서 아내가 살아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는 척 하지만 아내의 죽음을 계속 거부한다.
너무 사랑하면 그것은 고통이 된다.
코브는 아내를 너무 사랑했다. 코브와 아내는 평생 함께 하자는 약속을 공유하며 온전히 서로를 믿고 의지했다. 평생 함께 하자...과연 우리는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또한 그런 말을오직 한 사람에게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런 말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너무 쉽게 하고 있지 않을까? 사랑은 영원하다고 하는데, 사랑이 정말 영원한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랑을 영원히 지켜나가는 모습을 드문 요즘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상대방의 물질과 보이는 것의 비중에 맞추어 사랑을 선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과거의 사랑은 과거로 치부하고 현재 보이는 사랑을 사랑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사랑은 변하고, 사랑은 강력한 믿음을 주는 동시에 강력한 파괴력을 지녔다.
코브는 아내를 너무 사랑했고, 그래서 아내가 죽었음에도 아내를 잊지 못한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랑이 소모품처럼 되어버린 요즘 시대에, 사랑의 진실성과 순수성을 지켜가는 사람들이 아직 현실에 있다면, 고마운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너무 고맙고 고맙다. 지켜줘서 고맙다.
너무 사랑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신념을 지키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남자, 코브.
코브의 사랑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꿈 때문이었다. 코브는 자신의 꿈을 이용해 아내와 만나 50여년을 살아간다. 그것은 영화가 현실에서의 시간성과 꿈속에서의 시간성이 서로 다르고 꿈속이 훨씬 빠르게 전개된다는 전제에서 시작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코브는 죽은 아내를 꿈속에서 매일 만난다. 그리고 그는 꿈속에서 한 평생을 함께 살자는 아내와의 약속을 유지한다.
하지만 코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꿈의 일과 현실속의 일을 경계하는 방식이다. 그는 꿈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을 구분짓기 위해 토템을 활용한다. 여기서 크리스토놀란 감독이 설정한 토템은 토테미즘사상에서 연유한 듯 보인다. 토테미즘은 사물이나 동물을 신격화하여 믿는 신앙심리를 말한다.
과연 토템만으로 꿈과 현실의 공간을 구분하며 온전히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몸은 하나인데 살아숨쉬는 공간이 둘로 나누어져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결국 공황상태가 오지 않을까? 자아분열이 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꿈의 세계를 떠나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정말 그것이 답일까 마냥 꿈의 세계를 환상으로 치부하고 현실을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본질을 알아보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분하는가? 만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느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가능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실인 것과 사실이지 않는 것, 증명할 수 있는 것과 증명할 수 없는 것, 수 많은 이분법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구분한다 해도 나는 그 둘 사이의 구분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는 환상이 곧 현실이 되는 세계이니깐. 나의 바라고 희망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 즉 환상이 현실이 되는 것처럼, 꿈이 이루어지는 것, 즉 환상이 현실이 되는 것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없다.
다중 내러티브 미학
무엇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에서의 놀라운 점은 인간의 뇌구조, 기억과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의 세계와 접목시켜 실현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과 꿈, 꿈속의 꿈이라는 이중액자에서 꿈속의 꿈속의 꿈이라는 다중 내러티브로까지 나아간다. 마치 정신분석학 교과서를 보는 듯한 꿈의 전경화는 프로이드의 꿈, 무의식의 세계 전집을 제대로 통달하지 않고선 따라갈 수 없는 만큼 개연성이 뛰어나다.
어떤 기자는 이 영화의 서사를 '실제와 가상의 벽이 무화된 세계에 대한 포스트 모던적 통찰' , '꿈과 영화의 유사성으로 설명되는 메타 시네마' 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이 서사는 아주 놀랍고 뛰어나다. 애정하는 달시파켓은 이번 영화를 한국의 영화산업과 비교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인셉션>은 확실히 쉽지 않은 영화지만 한국 제작자들에게 유용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뛰어나지만 컨셉의 대담함과 시나리오의 복잡한 디자인이 특히 중요하다. 이 영화를 한두 문장으로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의 꿈속에 들어가 비밀을 훔칠 수 있는 한 남자가 재벌 사업가의 꿈속에 들어가 새로운 생각을 심도록 고용된다.’ 이 컨셉은 놀라우리만치 추상적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컨셉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려면 어느 정도의 대담성이 요구되지만 성공한다면 국제적으로 널리 인기가 있을 것이다. 시나리오에 대해 말하자면 어느 정도는 놀란의 재능이겠지만 시나리오를 발전시키는 할리우드의 정교한 시스템이 영화의 많은 조각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데 큰 힘을 줬다. 한국영화산업은 시나리오작가나 개발에 별로 투자하지 않기 때문에 <인셉션> 같은 시나리오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인셉션>을 모델로 삼아 야심찬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면 한국영화산업을 어떻게 발전시켜나갈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 제작자들이 <아바타>를 따라하고자 하면 돈도 버리고 희망도 잃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인셉션>을 따라하고자 하면 성공적인 소규모의 한국판 <인셉션>이 나타나든 그렇지 않든 한국영화산업에는 좀더 긍정적인 결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셉션]이 놀라운 영화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은 더 놀라운 감독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전작들을 보면 그의 사유체계가 무엇으로 점철되어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우선 그가 이번 영화를 통해
서사의 순행적 진행을 거부하고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역행 구조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메멘토]의 구성적 모티브와 공유하는 점이 크다. 메멘토 주인공 레너드가 단기 기억상실증을 극복하기 위해 끄적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메모와 문신,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두는 점에서나 앞서 말한 [인셉션]의 코브가 토템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동일한 서사 구조 방식을 이룬다.이건 뭐, 타임머신이라도 있어야 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이다. 문득 아인슈타인 아저씨가 조금 더 살아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인슈타인 아저씨가 에너지는 질량에 빛의 속도를 제곱한 것이라는 것을 내놓았기에 우리 생활에 많은 것이 변화했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을 접어서 한 점에 잘 보관하여 다시 풀어놓을 수 있는 공간성의 미학을 과학으로 잘 실현시켜 주었다면 타임머신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작가들이 역행의 플롯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예측 불가능성에 있다. 순행형 플롯 영화들이 예상치를 보여주거나 반전을 깔고 있더라도 그 효과가 일시적인데 반해 놀란이 선택한 역행의 플롯은 매 순간이 미스터리이다. 조금씩 벗겨지는 미스터리, 이 방식은 관객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기에 충분하다. [인셉션]의 구성적 스토리를 지각하는 관객은 아마 가설과 추정을 통해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여 영화를 감상했을 것이다.
걱정마시라. 우리 모두 사유체계를 가진 인간이기에 그럴 만한 능력을 모두 가졌다. 시도만 하면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대신,
우리는 경계짓는 일은 멈추어야 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 이젠 없다. 꿈은 현실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경계짓는 일은 멈추어야 한다. 경계는 관념을 흐르게 하지 않고 머무르게 한다. 그리하여 고정관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던가.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어 더 이상 쪼개어지지 않을 때, 모든 답은 나온다고 했다.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는 일을 멈추어선 안 된다. 나를 잘 안다고 자만해서도 안 된다. 또한 나를 쉽게 인정하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나의 폭력성을 타인하게 함부러 행사해서도 안 된다. 관념은 결코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아마 현실이 미워질 것 같다. 현실이 싫어질 것 같다. 현실이 고통스러워질 것 같다. 현실이 살기 싫어질 것 같단 말이다. 그래서 환상을 쫓을 것 같다. 그래서 꿈을 꾸기를 원할 것 같다. 영화에서처럼 말이다.
그러니 환상을 산산이 부셔질 수 있는 망상으로 치부하지 말자. 환상은 곧 현실의 밑거름이다. 환상은 무의식이요. 현실은 의식일 뿐이다.
전직이 보험 수사관이었던 레너드에게 기억이란 없다. 자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던 날의 충격으로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이름이 레너드 셸비라는 것과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는 것, 그리고 범인은 존 G라는 것 뿐이다.
중요한 단서까지도 쉽게 잊고 마는 레너드는 자신의 가정을 파탄낸 범인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메모와 문신을 사용하게 된다. 묵고 있는 호텔, 갔던 장소, 만나는 사람과 그에 대한 정보를 플라로이드 사진으로 남기고, 항상 메모를 해두며, 심지어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하며 기억을 더듬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기억마저 변조되고 있음을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한편 그의 주위를, 나탈리라는 웨이트리스와 테디라는 직업을 알 수 없는 남자가 맴돌고 있다. 그들은 레너드를 잘 알고 있는 듯 하지만 레너드에게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레너드는 그들을 만났다는 것을 늘 잊고 만다.) 마약 조직의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정보를 제공하는 나탈리는 테디가 범인임을 암시하는 단서를 보여주고, 테디는 절대 나탈리의 말을 믿지 말라는 조언을 한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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