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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보고 듣다(문장배달)

전혜린「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 ‘마지막 편지’(遺稿)」

by 아프로뒷태 2014. 11. 8.








전혜린「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 ‘마지막 편지’(遺稿)」

 

장 아제베도에게

 

  1965년 1월 6일, 새벽 4시.
  어제 집에 오자마자 네 액자를 걸었다. 방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네 냄새. 네 글(내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갑자기 네 편지 전부(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를 벽에 붙이고 싶은 광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하겠어.
너의 사랑스러운 눈, 귀여운 미소를 몇 시간만 못 보아도 금단현상(禁斷現象-아편 흡입자들이 느낀다는)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도 좀 들어야 가슴에 끓는 뜨거운 것이 가라앉는다.
  너의 똑바른 성격, 거침없는 태도, 남자다움, 총명, 활기, 지적 호기심, 사랑스러운 얼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Ich liebe alles an dir).
  내가 이런 옛날투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좀 쑥스럽고 우스운 것도 같다.
  그렇지만 조르쥬 상드(G.sand)가 뮈쎄(Musset)와 베니스에 간 나이인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나는 좀더 불태워야 한다고 분발(?)도 해본다.
  나의 지병(持病)인 페시미즘(Pessimismus)을 고쳐 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
  생명에의 애착을 만들어 줄 사람은 너야. 오늘밤 이런 것을 읽었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탄소, 수소, 질소, 산소, 염, 기타의 각 원소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다.' 어느 자살자의 수기 중의 일구야.
  장 아제베도!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 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내 속에 있는 이 악마(Totessehnsucht)를 나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악마를 쫓아 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줘.

 

 

● 출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서출판사 2004

 

● 작가 : 전혜린- 1934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55년 독일로 유학, 뮌헨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함. 서울대 법대·이화여대 강사·성균관대 교수를 지내고 1965년 자살로 생을 마감함. 주요 번역서『압록강은 흐른다』『생(生)의 한 가운데』,유고집『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등이 있음. 
 
● 낭독 : 장지아 – 배우. 연극 <남자충동> <에쿠우스> <마리화나> <생존도시> 등에 출연.

 



핵이 분열되고 융합할 때 에너지가 발생하듯 무엇인가 깨져나가고 이질적인 존재가 하나로 융합되면서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뜨겁게 발열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문학이란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녹여서 불을 밝힌 초 같은 게 아닌가 싶은, 다소간 비장한 생각이 듭니다.
겨울이 깊어가는군요. 저녁 거리에 서서 가로등이 툭, 툭 켜지는 순간을 보고 있을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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