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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보고 듣다(문장배달)

김원일 「전갈」

by 아프로뒷태 2014. 11. 8.




「전갈」

 

  김원일

 

  “강재필이 왔습니다.” 나는 벙거지 벗고 나 회장에게 머리를 숙였다.
  “얼마 만인가. 강 박, 반갑네.”
  나 회장의 쉰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
  “나는 강 박이 큰 그릇이라구, 여기 애들한테 늘 말했지. 학식 있고 의리 있는 남자라구. 강 박은 치밀하고 다이내믹한 데가 있지.” 나는 잠자코 있었다. “삼 년 동안 나를 원망했지?”
  “아닙니다.” 갑자기 머리가 패었다.
  “조부가 일제 때 행세깨나 해서 동대문 밖에 늘린 땅이 많았지. 부친이 해방 후 정치판에 뛰어들어 원남동 서른세 칸 집까지 날렸으니…….” 나 회장이 느직하게 회고담을 늘어놓았다. “군인들 세상이 되자 집안이 아주 기울었어. 그래서 밖으로 겉돌게 된 내 청소년 시절 나도 적잖게 고생깨나 겪었지.”
  나 회장이 조부가 친일파라고 대놓고 말하지 않았으나, 그의 말이 내게는 충격적이었다.나는 나 회장 부친 이야기를 감방에서 들은 적 있었으나 조부 이야기는 처음 듣는 셈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나 회장 조부가 영화를 누렸던 식민지 시절에 무엇을 했던가. 나 회장과의 인연이 어떤 숙명으로 맺어졌다는 느낌이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눈앞이 어리벙벙했다. 분노가 아닌 비애가 마음을 서늘히 적셨다.
  “따지고 보면 나도 죄 많은 놈이야. 요즘 들어서야 그런 생각이 부쩍 들어. 조상 잘못 둬서인지 못할 짓도 많이 했구…….” 나 회장이 말꼬리를 늦추었다. “명동 바닥 사보이호텔을 무대로, 김상사파 밑에서 배짱 키워온 세월이 까마득하구먼. 나도 나이 먹었구 운이 다했어. 여기 나 믿고 따라온 식구들 한 살림 차려주고 난 아주 물러앉을까 봐.”
  “회장님, 무슨 그런 말씀을요. 어떻게 일으킨 사업이신데.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한, 우리 기업은 계속 성장할 겁니다.” 나 회장 가까이에 앉은 작달막한 쉰 초반이 말했다.
  “사방에서 돌팔매질하는데 성장 중이라구? 무슨 쓸데없는 소리.” 나 회장이 짚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쳤다. “자네들 다 나가 있어!”
  나 회장 말에 여섯이 목례를 하곤 물러났다. 방을 나서는 그들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웠다. 나 회장, 김 부장, 나만이 남았다.
  “강 박, 듣자 하니 독립운동 한 조부에 대해서 뭘 쓴다며?”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내 일 맡을 수 있어?”  나는 잠자코 있었다.
  “다 지난 일이야. 지나고 보면 세상일이 다 그래. 피도 물에 섞이면 물이 돼. 당대에는 원수라도 다음 대에선 화해하구, 혼사가 맺어져 양가 피가 섞이구…….” 나 회장이 한숨을 깔았다. “강박, 요즘도 불면증 앓아? 뽕은 안 하구?”
  “그건 벌써 끊었습니다.”
  “이번 일 생각하면 통 잠을 이룰 수 없어. 이리 오게. 강 박 손 한번 잡아봄세.”
  배낭을 벗어놓고 나 회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휠체어에 앉아 있으니 키가 큰 나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을 꼭 자네에게 맡기고 싶어 김 부장을 밀양까지 보냈지.” 나 회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위해 이번 일 맡아줄 테지?”
  문득 영화 <대부>가 생각났다. 휠체어 탄 말론 브랜도 앞에 아들 알 파치노가 무릎 꿇어 사업을 전수받는 꼴이었다. (……) 내 처지는 사업이 아니라 청부살인 교사였다.

 

 

 

● 출전 :『전갈』, 실천문학사 2007

 

● 작가 : 김원일- 1942년 경남 진영에서 태어나 196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 소설『노을』『바람과 강』『겨울 골짜기』『마당 깊은 집』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독 :
조영진- 연극배우. 영화 <효자동 이발사> <밀양>, 연극 <도솔가> <시골선비 조남명> <어머니> 등에 출연.

이호성- 연극배우.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술자리에서 친구가 되는 법>, 연극 <갈매기>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등에 출연.

 



광복절이 막 지나갔습니다. 광복을 맞게 하는 데 몸과 얼, 삶을 헌신한 지사들은 일제에 의해 일신은 물론 온 집안이 결단나는 일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광복 후에 제대로 보상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요. 세월이 지나고 나니 독립운동은 옛 일이 되었고 남은 것은 가난과 헐벗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일제 때 일본에 협력하여 영화를 누리거나 주구가 되었던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기득권과 ‘기술’을 이용하여 해방된 나라에서 계속 잘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후손 역시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대를 이어 기득권층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걸 잘못했다고 나무라자는 건 아닙니다. 잊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무명의 독립지사 후손이 친일파의 후손이며 부자이고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번영할 ‘사업’을 하는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청부살인의 하수인이 됩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반전이 있습니다. 그는 순진한 사냥꾼이 아니라 전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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