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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4. 강원도 영월 여행 <단종의 슬픈 노래>

by 아프로뒷태 2013. 6. 16.

 

 

 

나는 어린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귀향 보내어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굽어진 서강의 한 모퉁이에서 형성된 모래섬.

그곳은 비가 많이 오면 강물에 잠길 것처럼 불안했다. 한편으론 강물에 둥둥 떠 있는 인공의 섬같이 기묘했다.

 

강을 건너면서 생각했다.

그 당시 귀향길에 오른 단종은 뗏목이나 돛단배를 타고 이 서강을 건너며 많은 생각을 했겠지.

사랑하는 왕비를 두고 온 슬픔, 왕위를 찬탈당한 슬픔, 세상을 알기에 너무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오욕칠정, 그 혼란한 심경을 가슴에 담고 유유히 저 모래섬으로 걸어갔으리라.

지금, 나를 비롯하여 많은 관람객들은 단종의 슬픔을 더듬어가며 통통배를 탔다.

 

 

 

단종이 머뭇렸던 곳이다.

기와집 하나 없는 남루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도 2000년 이후에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본래 유배지에는 여자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 시종도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죄인의 후예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서라고 한다.

그러나 단종의 유배지에는 어린시절때부터 단종을 키워온 참모를 따라 보내었다고 한다.

참모는 단종을 위해 밥을 해먹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 사약을 기다리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심정과 같지는 않았을까?

 

 

 

시종은 왕의 안면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대화가 오갈 때에도 왕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왕의 옆을 보며 말하였다.

 

 

 

이 소나무 참 기이하다.

사연을 들어보니, 단종의 슬픈 사연과 마음을 이해하여 소나무가 90도 각도로 누워 자라났다고 한다.

단종을 향해 충성의 절을 하는 형상을 지녔다고 하는데, 인간사의 일도 자연이 헤아려주고 보듬어주는 듯하다.

 

 

 

 

 

이 소나무도 기이한 소나무다.

단종이 이곳에서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이가 너무 보고 싶어 서울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하는데..

단종의 슬픈 사연이 담긴 이 곳을 사람들이 단순히 유배지의 땅으로 생각하지 않게 장엄한 소나무로 단종의 정신을 담았다고 한다.

 

 

이곳에 소나무 숲이 절경이다.

더욱이 위 사진에서 왼쪽 끝에 있는 한뿌리에 두 나무로 자란 소나무는 관음송이라고 부른다

단종 유배시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1988년 천연기념물 제 349호로 지정되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이 소나무가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 때로는 단종이 오열하며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뜻에서 관음속이라 불리어 왔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 서로 비스듬히 자랐다.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60년으로 하여 계산한 것이다.

 

 

 

 

 

 

 

 

관음송의 자태가 너무 아름답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이 곳 청령포(청음포: 옛날에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이곳에 음기운이 세고 건강에도 좋지 않아, 청음포라 불리었다)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단종이 올라가 한양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2달 정도 지냈다고 하는데, 매일 하나의 돌을 쌓으며 바라고 또 바랐겠지. 혹여 수양대군이 다시 자신을 불러주지 않을까? 또는 사랑하는 왕비가 자신을 찾아와 주지 않을까? 또는 충성심이 강한 대신들이 자신을 찾아주지 않을까?

 

 

 

 

 

 

 

 

 

결국 단종은 이곳에 온지 2개월 뒤에 다른 곳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그 이유인즉, 당시 이곳에 6,7월쯤에 왔는데, 장마철인지 비가 아주 많이 내려 강이 범람할 정도였다.

강물에 섬의 대부분이 물에 잠길 정도라 이곳 가까운 땅의 다른 곳으로 옮겨 유배생활 2개월을 더 했다.

그러다 10월에 수양대군이 내린 명령으로 사약을 받고 단종은 생을 마감했다.

사약을 받고 죽는 것도 서러운데, 그 이후의 사연이 더 애절하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시신을 서강에 떠내려 보내라고 했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3족을 멸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더 서러웠던 단종의 죽음...

 

 

그럼에도 엄홍도라는 자가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저녁에 남모르게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염을 했다.

나는 그 뜻이 존경스러워 엄홍도와 세 아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었다.

영월에 그들의 뜻을 기린 기념관이 있는데, 한 번 방문해보고 싶었다. 그들의 사연이 궁금했기에...

 

당시 엄홍도와 그 세 아들은 시신을 거두어들인 후에 김시습(영월에 김시습의 기념관도 있다)과 함께 계룡산 동학사에서 단종의 초혼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의로운 일을 했기에 벌을 내린다면 달게 받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후에 충신으로 그들의 의로운 행적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왕대 밭에 왕대 나고 신우대 밭에 신우대 나듯, 충절의 후손은 비록 가난하게 살더라도 정의가 아니면 탐욕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엄홍도의 말이 오늘날 한국의 정치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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