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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

ㆍ슬레이트 지붕과 근대화와 철거 그리고 폐혜

by 아프로뒷태 2012. 12. 15.

슬레이트 집서 50년 산 김 할머니 “겁나게 정이 들어부렀는데 이번이 마지막 겨울이네” 박용근 기자 yk21@kyunghyang.com

 

“이 집서 50년을 살았당게. 물이 새 시멘트로 땜질한 곳도 많응께. 자식들이 어미 고생한다고 부엌만 입식으로 만들어 놨제. 그래도 여그서 5남매를 가르치고 시집, 장가 보냈지라우.”

전북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 교촌마을. 70여가구가 모여 사는 이 마을의 유일한 슬레이트집 주인 김인순씨(80)는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남편은 11년 전 작고하고 5남매도 모두 출가했다. 김씨는 “시골에 혼자 사는 노인이 한두 집이겄어. 젊은 사람들이 없응게 나이 먹은 노인네들끼리 의지하고 사는 게 낙이제”라며 웃었다.

교촌마을의 취락 변천사는 역설적이다. 이 마을은 호남고속도로와 맞닿아 있다. 이 때문에 마을주민들 의사와 무관하게 주택개량사업이 펼쳐진 곳이다.

50년간 슬레이트 집에서 살아온 김인순 할머니가 자신의 집 지붕을 가리키며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박용근 기자

 

“새마을사업이 시작되면서 우리 집이 가장 먼저 슬레이트집이 됐당게. 그전에는 초가집이었제. 지붕 개량할 때만 해도 새 집을 짓는 기분이였어. 벌써 까마득한 옛일이 돼버렸구만.”

당시 슬레이트집을 가진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초가집이 천지였던 세상에 슬레이트라는 건축자재는 시골사람들에게 부의 상징처럼 보였다. 김씨의 슬레이트집은 두 채다. 지금은 헛간이 된 아래채는 원래 본채였다. 본채에서 살던 김씨 가족들은 흙벽돌을 찍어 지금의 슬레이트집을 지었다. 1963년쯤 일이다. 교촌마을의 다른 집들은 모두 양옥으로 변신했다. 슬레이트 지붕이 간간이 보이지만 대부분 헛간으로 쓰거나 아래채만 남았다. 김씨의 슬레이트집이 아직도 건재한 것은 마을 뒤편에 자리잡은 탓이다.

시골마을인데도 양옥집이 많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1970년대 들어 고속도로변 가옥미화사업이 시작되면서 슬레이트집들은 양옥집으로 다시 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고속도로변 마을의 미관을 살리는 현대화사업에 착수했다. 마을 가옥 중에서도 고속도로에서 눈에 잘 띄는 곳은 강제 개량대상이었다.

이 마을에 사는 이환주씨(50)는 “어렸을 적에 멀쩡한 슬레이트집을 허물고 양옥집을 지었다. 아버지는 주택현대화사업에 참여할 생각이 없으셨는데 고속도로변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강제로 개량대상이 됐다”면서 “저리로 자금을 융자받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적지 않은 돈을 부채로 떠안긴 전시행정이었다”고 말했다.

이 마을의 유일한 슬레이트 본채인 김씨의 집도 내년이면 자취가 사라진다. 김씨의 자녀들이 봄이 되면 슬레이트집을 헐어내고 양옥집을 지어주기로 작정했다.

김씨는 “다 찌그러져가는 집이지만 50년간 살다봉게 겁나게 정이 들어부렀다”면서 “새끼들이 봄이 되면 새 집을 지어준당게 마지막 겨울을 나게 될 모양”이라고 섭섭해했다.

 

 

 

새마을 운동의 상징 슬레이트… 비산 먼지로 올해부터 단계 교체 ,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마스크와 안전모를 쓴 철거 인력이 슬레이트 지붕 위로 올라갔다. 비산이 흩날리지 못하도록 습윤제를 뿌린 후 조심스럽게 슬레이트를 한 장 한 장 벗겨내기 시작했다. 이달 초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4가의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이 철거되던 날. 멀찌감치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선 주민들은 고단한 삶의 무게가 켜켜이 내려앉은 슬레이트 지붕이 뜯어져 나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40여년 전만 해도 ‘근대화의 표본’이자 ‘새마을운동’의 상징이었던 슬레이트 지붕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다.

서울시가 벌이고 있는 슬레이트 지붕 교체사업에 따라 인부들이 한 슬레이트 가옥의 지붕을 철거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서울시는 올해부터 예산 8억여원을 투입해 슬레이트 지붕 교체 사업을 벌이고 있다. 석면으로 만들어진 슬레이트는 노후화되면 공기 중으로 비산 먼지를 방출해 거주자의 건강을 심각히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아직도 슬레이트 집이 있느냐며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서울에는 현재도 1만610채의 슬레이트 집이 남아 있다. 이 중 과반수인 5780채는 아직까지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주택이다. 서울의 슬레이트 집들은 산동네나 달동네뿐 아니라, 당산동4가의 경우처럼 아파트와 신식 빌라들 사이 구석구석에 섬처럼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6·25 이후부터 계속 이 동네에서만 살아왔다는 김이규씨(72)는 원래 이 슬레이트 집들이 초가집들을 허물고 세운 벽돌공장 사택이었다고 했다. “그때는 슬레이트가
좋은 집이었어. 단열이 잘되고 내구성이 뛰어나다고 좋은 자재라고들 했지. 우린 슬레이트 위에다가 고기도 구워먹고 그랬어. 그 맛이 아주 일품이었는데. 누가 몸에 나쁜 건 줄 알았나. 먹고살기 바빠 몸에 좋은 게 뭔지 신경도 못 쓸 때였으니….”

벽돌공장 사택 시절까지만 해도 그럴듯한 신식 주택이었던 이 슬레이트 집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아파트나 빌라로 이사갈 형편이 안되는 가난한 자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됐다. 1970년대 중반, 이곳 슬레이트 집에 신혼살림을 차렸던 소명자씨(59)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40년 동안 죽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소씨는 “돈이 없어서 이사를 못 갔다”고 했다. 지붕이 오래돼 여름만 되면 비가 새지만, 그때마다 슬레이트를 한 장씩 사서 덧대는 수준으로 수리해 가며 근근이 버텨왔다. 그러던 언젠가부터 TV에서 슬레이트 지붕이 석면을 방출해 몸에 위험하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고생하며 살다보니 몸이 안 아픈 데가 없는데, 석면 때문에 더 그런가 싶어 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몇년 전부터 지붕 교체 비용을 알아봤는데 도저히 우리 형편에 감당이 안되는 거예요. 그런데 마침 구청에서 지붕을 공짜로 바꿔준다기에 얼마나 고마운지….”

슬레이트 지붕을 제거하는 데 드는 비용은 200만원, 그리고 새 지붕을 설치하는 개량비는 300만원 정도로 지붕 교체에 모두 500만원가량이 필요하다. 영등포구청 관계자는 “슬레이트 지붕 주택 거주자 대부분이 독거노인 등 경제적 취약계층이라 정부 지원금 없이는 지붕 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라며 “또 대부분의 경우 세입자여서 구청 직원들이 일일이 집을 방문해 집주인 연락처를 알아낸 후 교체 허락을 받아내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올해 202개 슬레이트 지붕을 교체하는 등 예산 범위 내에서 해마다 철거 대상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슬레이트, 한때 부의 상징서 빈자 안식처로… 서울에 1만여동,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ㆍ슬레이트 지붕과 근대화

지금은 석면을 유발하는 애물단지가 돼 철거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한때 슬레이트 지붕은 가난을 극복한 ‘근대화의 표상’이자 ‘새마을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전국 250만 농가의 대다수는 초가지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초가지붕을 ‘가난의 상징’이라 여겼다. 1969년 2월15일 경제과학심의회에서 한 발언은 초가집에 대한 박 대통령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지방에 갈 때마다 가장 서글프게 생각되는 것은 수천년 동안 그대로 내려오는 농촌의 초가집”이라며 “지금 당장 한꺼번에 모든 초가집을 없앨 수는 없으나
시멘트 등 생산량이 증대하고 농민 수입이 늘어나면 초가집은 자연히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불과 몇 년 후 초가집을 한꺼번에 없애는 데
성공했다. 1971년 박 대통령은 ‘농촌주택 개량사업’을 추진한다. 이 사업의 특명은 ‘초가지붕 없애기’였다. 이때 초가지붕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시멘트로 만든 슬레이트 지붕이었다. 싸고 빨리 지을 수 있는 데다 내구성이 뛰어난 슬레이트는 ‘꿈의 자재’로 여겨졌다.

정부는 개량사업 4년차인 1975년까지 전국 135만4000채의 초가집을 개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전국 초가지붕의 절반가량을 4년 만에 없애버리겠다는 목표였다. ‘생각 같아서는 초가집을 단박에 쓸어버리고 싶다’는 박 대통령의 심중이 반영된 덕일까. 정부는 이 엄청난 목표를 심지어 초과달성까지 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1975년 10월, 지붕이 슬레이트나 기와로 바뀐 집은 무려 143만7000채에 달했다.

근대화 추진의 실적이 슬레이트 지붕 개량 갯수처럼 돼버리다 보니, 이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경제과학심의회 발언이 있고 난 지 불과 3개월 후인 1969년 5월
경남 진양군에서는 밤중에 길가에 있는 초가집 13채가 강제로 철거돼 40여명의 주민이 거리로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 대통령이 관내 농업용수개발공사 현장을 시찰 나올 것이란 통보를 받은 도지사가 “국도변의 낡은 초가에 ‘미화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자,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꿀 시간이 부족한 면장이 급한 김에 아예 집을 강제로 헐어버린 것이었다.

일부 농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1978년 5월11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충남 서산군 해미면사무소에 근무했던 한 서기의 말이 나온다. “저는 지붕개량사업이 한창이었던 1973년도의 일을 잊지 못합니다. ‘초가라도 몇 대를 별 탈 없이 살아왔는데 새삼스럽게 왜 지붕을 뜯어고치라느냐’며 달려드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지붕개량 담당 부락으로 출장을 나갈 때는 꼭 싸움터에라도 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슬레이트 개조
비용이 모두 농민들의 빚으로 충당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농민들의 반발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정부는 슬레이트로 개조할 경우 가구당 보조금 5000원과 융자 5000원 등 모두 1만원의 자금을 지원해줬다. 그러나 농민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25~30평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개조할 경우 모두 90장의 슬레이트가 필요했다. 당시 1장당 시중 가격이 430원이었고, 여기에 용마루 자재와 기술자 노임 등을 모두 합하면 한 가구당 최소 5만9300원의 예산이 든다. 정부 지원 1만원을 빼면 4만5000원의 현금을 농민이 부담해야 했다. 당시 벼 한 가마니가 4000원이었으니 10가마의 벼를 팔아야 벌 수 있는 돈을 지붕개량에 써야 했던 셈이다.(동아일보 1972년 4월12일자)

이 와중에 재미를 본 것은 슬레이트 생산회사와 대리점들이었다. 1971년부터 1977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240만개의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는데 이에 쓰인 슬레이트를 금강·한국·동양 등 6개의 골 슬레이트 메이커와 3개의 기와 슬레이트 메이커가 모두 공급했으니 이들은 슬레이트를 팔아치워 엄청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경향신문 1978년 5월27일자)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슬레이트가 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된 것은 슬레이트의 주성분인 석면이 1급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다. 새마을운동 당시에는 석면에 관한 규제나
법률이 거의 없었다. 슬레이트의 주성분인 석면 가루를 마시면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40년의 잠복기를 거쳐 폐암이나 석면폐, 늑막이나 흉막에 암이 생기는 악성중피종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1990년대 들어서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지난해
석면관리 종합대책을 세우고 지자체와 함께 올해부터 2021년까지 10년간 ‘슬레이트 처리 지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슬레이트 철거비와 새 지붕 설치비를 거의 전액 지원하는 서울시와 달리 일부 지자체는 예산 부족으로 비용 일부만을 지원하고 있어 교체작업이 더뎌지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 가옥 거주자의 상당수가 70~80대 노인들이고 이 가운데는 세입자가 많은 것도 문제다.

현재 전국적으로 약 88만개의 슬레이트 지붕이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971년부터 1977년까지 불과 7년여 만에 240만채의 슬레이트 가옥이 초고속으로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88만 가옥의 슬레이트 지붕을 철거하는 데만 10년 이상이 걸리는 셈이다. 초가지붕과 둥근 박으로 대표됐던 농촌의 지형을 순식간에 갈아치운 ‘슬레이트 광풍’. 바꾸는 것은 쉬웠지만, 그로 인한 근대화의 그림자를 지우는 일은 그만큼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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